겹쳐진묵시

에스까페아르 개인전 <겹쳐진 묵시> 전시 포스터 이미지

전시평론

# 공포의 뿌리
사람의 눈은 내일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한다. 소리, 촉감, 진동, 냄새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두려움은 주로 눈의 감각이 한정되거나 기능할 수 없는 어둠, 혹은, 시선의 뒤편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 몸은 생태에서 살아남기에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문명 이전의 야생, 두 발로 걷게 된 이 종족은 피부에 털이 없고, 생태계에서 비교적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생존하기 위해 군집을 이루게 되었고, 여러 명의 감시자를 통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점령해 나갔으며, 두려움을 만들어 내는 위험 요소들을 하나씩 정복해 왔다. 이름 앞 글자에 ‘성(family name)’이라는 표식을 만들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번식하여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연대를 만들어왔다. 아주 작은 부족에서부터 시작해 여러 갈래의 지역과 국가로 분할되면서 다양한 문화와 인종, 종교로 구분되어 닿을 수 없는 견고한 벽이 세워졌다. 머나먼 과거에 기거한 또 다른 우리가 겪었던 생존본능은 사라졌지만, 이제 우리는 소비된 자연과 마모된 환경을 안고 있다. 내일이라는 일종의 목적과 성과를 위해 환경을 소모하고 갉아먹는다. 생존과 안전을 넘어 보이지 않았던 영역을 거침없이 파헤치고 들추어내었기에 이제 파멸되고 사라질 내일에 대한 공포가 오늘을 잠식하고 있다. 지금의 우리는 한계와 고갈이 자리하는 결핍의 땅에 서 있다.
# 신의 땅
미래, 내일, 앞으로 나아가는 가능성의 시간이 점차 사라지면서 인간은 죽음 이후의 삶, 영생과 믿음의 공간으로 시선을 돌리곤 한다. 기독교의 천국, 불교의 열반, 힌두교의 윤회와 같은 개념들은 모두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연속되고 연장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종교적 믿음은 신앙인들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된다. 종교적 의식과 예배 장소는 인간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신성한 공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이다. 예배당, 사원, 모스크와 같은 종교 건축물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신과 소통하는 신성한 장소로 인식된다. 이러한 영적 공간은 신성한 존재와의 교감을 통해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신을 찾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생존을 위해 다른 생태계를 파괴하고 개발하기 시작한 때부터, 혹은, 같은 종을 적대시하기 시작한 순간부터였을까. 아마도 환경을 비롯한 모든 종의 우위를 점했던 시점부터가 아닐까. 이 땅에 붙어 있기 위해 우리를 지탱하는 땅을 무너트리고 소진하면서 두발을 서 있게 할 내일의 땅이 점차 고갈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이 있는 영원의 땅을 밟고자 하지만, 우리가 딛고 있는 흙과 바위가 있는 이 땅은 더 이상 내일과 지속을 보장하지 않게 되었다. 여분의 땅이 사라진 이 바닥에서 더 이상 우리의 일상과 생활을 지속하고 유지하게 해줄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 명확한 면적과 기간을 보장하는 자본만이 땅을 일굴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 은폐하는 거울
이 사라지고 삭제되는 한정된 땅에서, 평면의 공간, 캔버스는 작가 에스까페아르에게 일종의 안식이자 영적인 공간으로 활용된다. 스스로 어떤 것을 은폐하려는 듯한 화면은 모래알, 혹은 진흙으로 뒤덮인 어느 해안가, 해변의 표면과 흡사하다. 그는 인간이 가진 가장 말초의 욕망에 시선을 집중한다. 동시에 감출 수 없는 강한 결핍과 폭발하는 과잉을 직면하면서 스스로 고민하고 고뇌한다. 그의 근작들을 살펴보면 은폐와 노출의 감정이 충돌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캔버스의 표면을 유영하는 붓과 손은 지우고 생성하기를 반복하면서 인간의 치부를 드러내고자 하면서 그것을 가리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그려졌다기보다는 문대고 쓸려진 자국들이 표면 위를 항해하고 있는 화면은 사라짐을 암시하는 동시에 새로운 형태를 갈구하고 있다. 이전까지 그의 작업은 어떠한 이야기와 표상을 쫓아갔다. 바라본 현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침투하여 어제의 치부와 내일의 공포가 충돌하여 만들어진 일종의 기념비, 사물로써의 명사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는 가리고 들추어내는 가감 없는 손의 동작을 통해 가장 기저에 있는 뿌리의 감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정된 단어, 견고한 울타리, 이야기의 기념비가 아니라 움직이는 동사, 유연하고 가변하는 동선, 가능성의 열린 결말로 가고자 하는 손짓을 건넨다. 이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회고하는 거울이자 서로 이길 수 없는 창과 방패의 즉흥적인 춤으로 발현된다. 생산과 파괴를 자행하고 탄생과 죽음을 경험하는 우리 자신에게 보내는 가장 원시적인 독백이다. 상하, 좌우의 구분이 모호한 그의 화면은 파국으로 치닫는 현재 진행형 시간을 담고 있다. 작가의 손에서 중력과 척력, 해체와 조합, 물리적인 법칙은 무력하게 평온한 풍경을 무너트린다. 이 화면에는 고갈되는 지면 위에서 흔들리는 유약한 얼굴이 담겨 있으며, 파멸과 생성이 교차하는 경계의 시간을 품고 있다. 작가는 불완전한 미래를 향하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손에서 연장된 붓, 그 끝을 부여잡고 있는 물감을 거울삼아 감춰지고 은폐된 파괴의 얼굴을 가감 없이 들추어낸다.
# 재생의 노래
내일에 대한 기대, 미래의 가능성, 그리고 다음 세대에 대한 동경은 이제 오래된 유물이 되었다. 산업화 시대, 인간의 손을 대신하게 된 기계의 대량생산은 빠른 속도로 유토피아를 그려내면서 기존의 세계를 업데이트하고 확장했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자원 소모로 인해 점차 다음 세대가 누리게 될 환경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가상의 출현, AI의 성장은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이해하게 했지만, 많은 것을 잃게 하고 손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만들어 냈다. 이제 다음을 기약할 수 없고, 가장 가깝고도 내밀한 개별자의 영역마저 침범받게 되었다. 이제 내일의 공간에는 파국의 이미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예언가의 날,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앞에 종말의 날을 상상하면서, 결말의 이야기가 퍼져 나가고 있다. 하지만, 사라짐은 새로이 생성되는 어떤 신세계를 전제하고 잉태한다. 물리적 범주에서 보면 죽음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 다른 유기물, 혹은 무기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보다 더 이상적인 세계, 어제와 오늘의 인내를 딛고 만나는 내일의 신세계를 위해 우리는 오늘도 나를 둘러싼 세계를 파괴하고 허문다. 작가 에스까페아르는 파괴되는 땅과 재건되는 기념비, 죽음으로 치닫는 몸과 잉태되는 시간 사이에서 스스로의 초상을 가늠한다. 자신의 얼굴에 숨겨진 수많은 파멸의 유전자를 되돌아본다. 이 땅에 기거하기 시작하면서 직면해 왔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피어나는 생존의 희망과 기원이 만나는 좌표에 그가 서 있다. 작가는 공포로부터 비롯된 환상과 환각으로 인해 잡을 수 없었던 멸망의 도상을 매만진다. 무너지고 쓰러져 만들어진 이 땅이 아니라, 다음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강박 사이의 가느다란 줄을 잡고서 한정된 시간에 반응하는 갈증의 웃음을 지어내고 있다. 이는 오늘의 끝자락에서 피어나는 지속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순환 속에 기거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에게 보내는 재생을 위한 노래다.
_박소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