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전 <겹쳐진 묵시> 전시 포스터
작가노트
겹쳐진묵시
파멸적 욕망이 불러온 미래 종말의 모습과 자연의 심판
자연이 심판하는 인간 종말(Apocalypse)의 장면을 초현실적 ‘묵시화’를 남기고 있다.
#후식과 공포 그리고 디스토피아
유일하게 인간만이 후식을 먹는다. 배고픔은 사라졌지만, 위장을 채운 느낌만으로는 충족하지 못한다. 만족은 끊임없이 그 이상을 갈망하게 한다. 욕구가 결핍을 메우는 과정이면 욕망은 타자와의 비교가 촉발한 결핍을 충족하려는 감정이다. 비교를 통해 채우려는 만족은 반드시 불안을 동반한다. 대상을 바랄 때 그 안에 불안이 싹트고, 존재를 두려워할 때 숨은 욕망을 본다. 욕망이란 꽃이 활짝 피어날수록 불안과 두려움은 더욱 어둡게 뿌리내려 간다. 기술 진화와 문명 발전도 이와 같다.
부족과 불편에서 시작한 기술 발전은 문제의 해결에서 출발했으나 인간은 그보다 더 큰 편리함과 자동화를 원하고 있다. ‘첨단기술의 유토피아’를 위해 기계화, 자동화, 인공지능을 이뤄냈지만, 도리어 이들은 우리 자신을 서서히 옥죄고 있다. 우리가 파괴한 자연으로부터 ‘부자연과 부자유’라는 이름의 디스토피아를 되돌려 받고 있다.
#이상기후와 재해, 종말의 공포
어릴 적 교과서에서 지구가 울먹이며 체온계를 물고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선생님은 지구가 점점 더 병들어가는 이유를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환경에 대한 염려는 실체가 모호한 ‘불안’에 가까웠다. ‘자연보호’ 문구도 도덕률 정도로만 여기는 먼 미래 일로 느꼈다. 그러나 지금의 이상기후와 생태계 파괴는,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실체가 뚜렷한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홉스는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욕구가 ‘끝없는 공포’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미디어에서는 전 세계 수많은 이상기후 현상을 밤낮없이 보도하고, 학자들은 지구는 100년 안에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 오고 있다고 말한다.
대다수는 재난 기사를 한두 번의 터치로 무심히 넘긴다. 매체가 길들인 공포의 반복은 익숙한 무관심을 퍼뜨렸다. 반면 나는 길을 걷거나 세수할 때, 일기예보를 들을 때 자주 지구 종말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 감정은 어릴 적 들었던 지구온난화로부터 시작됐고, 근래 경험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지구적 팬데믹으로 인해 더 커졌다.
#멸망과 재생의 묵시화
오늘날을 기록하며 미래에 살아갈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자주 상상한다. 동시대 인간의 행위를 관찰하고 개발로 인해 자연이 무참히 파괴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집중한다. 묵시화(默示畵)는 생태주의와 묵시가 ‘겹쳐진’ 그림이다. ‘직접 드러내지 않고 은연중에 뜻을 나타내 보임’의 뜻인 묵시(Apocalypse)는 미래, 환상, 상징적 요소가 들어있다. 무의식적으로 그은 선이 임의의 얼룩 바탕을 만들어 내고, 그 얼룩에서 매일 다르게 나타나는 환각적 도상을 찾아 초현실적으로 결합하는 나의 작업 방식은 묵시와 닮아있다. 묵시화 속의 가장 큰 주제는 인간 중심의 자연 지배적 세계관, 특히 서양 전통 세계관에 내재한 인간 우월주의로 비롯된 생태 위기이다.
그간 동시대 디스토피아 사회에 대한 나의 상상은 이를 넘어 대혼란 속 종말인 아포칼립스로 향하고 있다. 환난의 한가운데 기술로 무장한 인간과 훼손돼 무너진 자연이 존재한다. 인간의 자연 지배 시도가 끝이 나고 자연에 의해 ‘모든 게 본래 그러하도록’ 되돌려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없이 무력하다. 그 과정 속 구성원이자 관찰자로서 충분히 ‘예측 가능한 멸망’을 예견하며 멸망과 재생의 묵시를 그리고 있다.
전시기획
새로운 작업 방식으로 작업중인 <예고된 역습>의 과정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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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청년예술인 선정과 공간 탐색
작년 ‘강원문화재단 생애 첫 지원’ 공모 선정에 이어 올해는 ‘강원문화재단 청년예술인 지원’ 공모에 선정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작업과 일용직으로 생계만 이어오다가 공모 마감 이틀 전에 갑작스럽게 서류를 쓰게 되었다. 큰 기대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그간의 작업들을 정리해서 올렸는데 운이 좋게도 면접까지 가게 되었다. 사실 극도의 면접 공포증과 울렁증이 있어서 면접 당일 3시간 전에 카페에서 예상 질문과 나름의 답변들을 준비하였는데 실제 면접에서는 준비한 것들에 대한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면접 내내 작성한 서류들을 긍정적으로 봐주시고 힘이 되는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생애 처음으로 자신감 있게 면접을 볼 수 있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좋은 전시 공간을 구하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다. 여러 갤러리와 컨택하였고 많은 고민 끝에 결국 원주에서 올해 전시를 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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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방식에 대한 고민
공모에 지원할 때부터 올해는 그간의 작업보다 큰 작업을 시도하고 연구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강남의 여러 갤러리 전시에서 본 대형 작품들에 매료된 것, 작은 작업들만으로는 공모 지원에 있어 분명한 한계를 느낀 점, 작업실을 방문한 사람들로부터 ‘보다 큰 작업은 없냐’는 질문을 자주 받은 점이 주요했다. 작은 작업이나 큰 작업이나 결국 같은 양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공이 들어간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120호 작업을 시도해보니 바탕부터 구성까지 간단히 진행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붓도 커져야 했고 큰 화면에서 어느 정도 밀도를 담아야 할지 그간의 작업 방식만으로 진행이 가능할지 등 여러 가지를 놓고 고심하였다. 그간 무의식적으로 그은 선들 속에서 교차되어 보이는 어떤 형상을 주로 좇아 그림을 그렸는데, 작업 면의 사이즈가 커지다 보니 그간의 작업 방식만으로는 작업 진행이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의식이 있는데 억지로 무의식적 선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는 지점에서 아예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마음대로 캔버스를 문질러 보기로 하였다. 한 두 개의 선과 흔적에서 도상을 찾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얼룩덜룩한 바탕에서 작업을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붓이 아닌 수세미를 잡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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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시도와 탐구주제
SNS를 통해 해외의 작가들이 수세미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추구하는 바는 수세미로만 그리는 방식은 아니었다. 수세미와 붓, 나이프, 헝겊 등 다양한 도구들을 활용해 손 가는 대로 임의의 얼룩을 만들어 나갔다. 바탕이 만들어지고 다 말라갈 즈음부터 캔버스와 진지하고 지루한 대화를 나누어야만 했다. 전보다 훨씬 복잡한 바탕 속에서 그날 그날 드러나는 형상들을 천천히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여지는 대상들을 유화를 사용하여 두텁게 그려나가려고 했지만,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리고 지우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뭔가 진하게 그리기보다 이미 드러나 있는 어떤 형상들 위에 덮혀진 물감을 지워나가는 방식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음을 발견했다. 또 그런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재미있고 만족스러운 이미지가 나왔다. 이러한 기법적 방식에 기존 욕망과 두려움이란 주제를 넘어 욕망하는 인간이 불러온 지구파괴와 인간 멸종의 주제를 담아 그렸다. 지금껏 본 주제에 대해 막연한 상상만으로 초현실적 이미지를 나타내봤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실제로 전세계적으로 논의중인 ‘인류세와 파국’이라는 연구자료와 강의, 논문들을 바탕으로 전시의 방향을 정하였다. 3년 전 개인전을 준비하며 그렸던 몇 점의 풍자 드로잉을 비롯하여 유화로 그린 전시 미공개 그림들, 전시 주제와 결이 맞는 크고 작은 그림들로 이번 개인전 <겹쳐진 묵시>를 기획하였다.
설치과정
전시장 도면과 실제 전시장 내부는 다르기에 사전에 여러 차례 방문해 분위기와 동선을 파악하여 설치 당일 오차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다.
이번 전시는 카페와 공간을 공유하여 사용하게 된 까닭으로 작품 설치와 구성에 있어서 자유도가 높지 않았다. 그간의 개인전은 모두 전시 테마에 맞는 음악과 설치물들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그림만을 거는 것으로 마음 먹었다. 전시 공간이 전문 갤러리가 아닌 까닭에 조명이나 벽면 컨디션, 중간 중간 일정 간격으로 보이는 철골 기둥이 작품 감상에 아쉬운 지점이었다. 그럼에도 천장이 높고 공간이 무척 넓은 점, 공간이 원주시 외곽에 위치함에도 카페를 이용하는 손님과 공연을 보러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작품 전시용 레일이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지만, 레일을 사용하여 설치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시멘트 벽을 뚫어 그림을 걸었다.
작품 사이즈가 제 각기 다 달라서 생각보다 작품을 깔끔하게 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갤러리에 작품을 설치해본 사람이면 모두 알겠지만, 작품에 와이어가 달려 있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일률적으로 설치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와이어를 최대한 팽팽하게 당겨 작품 상단과 못이 박히는 지점의 길이를 재 벽 타공을 진행하려 하였다. 그런데 막상 진짜 큰 어려움은 지금부터 시작되었다.
진짜 큰 문제는 벽면 타공용으로 가져간 전동 드릴이 힘이 약해 벽을 제대로 뚫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했던 문제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이런 문제를 대충은 예상해서 전시 일주일 전부터 설비하는 지인에게 작품 설치일에 벽 타공용 함마드릴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해두었고 본격적인 설치는 지인이 도착하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이번 작품 설치에도 주변분들의 도움 덕택에 겨우 겨우 진행할 수 있었다. 개인전을 하면 할수록 혼자 해내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 <예고된 역습>. 전시 공간 관계자와 설치를 도와주러 온 지인.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전시 레터링 시트 부착. 하나도 몰라서 유튜브 보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아주 천천히 진행했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것 중 하나가 벽면에 붙이는 전시 ‘레터링 시트’였다. 보통은 유리창에 부착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하는데 시멘트 벽에 잘 부착할 수 있는지 반신반의 하며 디자인을 의뢰하였다. 애초에 의뢰했던 레터링 시트는 A1사이즈가 꽉차는 분량이었는데, 실제로 부착을 시도하다보니 벽면 페인트가 떨어질 위험이 매우 컸고 전시 철수 시 이 모든 내용을 하나 하나 뗄 생각하니 그 점도 막막했다. 좀 아쉬웠지만, 전시 개요와 전체 전시 내용을 관통하는 큰 메시지만 부착하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전시공간 앞 도로에 설치한 전시 홍보 현수막. 전봇대와 표지판 사이의 거리는 나의 보폭으로 6걸음 반. 이를 바탕으로 맞춤 사이즈의 현수막을 제작하였다.
전시 홍보는 온 오프라인으로 다양한 경로로 진행하였는데, 그럼에도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홍보는 전시장 앞 홍보였다. 실제로근처를 지나가다 이 현수막을 보고 궁금하여 들어온 관객도 적지 않았다. 인스타그램 홍보나 전시 홍보 사이트만큼이나 중요한 게 전시장 앞 홍보임을 이번 전시를 통해 깨달았다.
전시전경
전시공간 앞 전시를 홍보하는 스탠딩 배너와 전시장 도면. 공간이 워낙 넓어 입구부터 안내해야 했다.
설치가 완료된 전시 레터링 시트와 방명록 코너. 전시 안내 도면과 캡션, 전시 작품리스트, 작가노트가 놓여있다.
올해부터는 지원사업 평가 항목에 ‘관람객만족도 조사’항목이 추가되었다. 평가 항목이 너무 많아 말이 많았다.
처음으로 단체 관람객에게 전시 큐레이팅을 진행하였다. 그중 외국인도 있어서 영어 통역도 간간히 진행되었다.
작품과 작가. 전시 첫날 혼자 전시 전경을 촬영했다.
작품리스트
전시평론
# 공포의 뿌리
사람의 눈은 내일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한다. 소리, 촉감, 진동, 냄새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두려움은 주로 눈의 감각이 한정되거나 기능할 수 없는 어둠, 혹은, 시선의 뒤편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 몸은 생태에서 살아남기에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문명 이전의 야생, 두 발로 걷게 된 이 종족은 피부에 털이 없고, 생태계에서 비교적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생존하기 위해 군집을 이루게 되었고, 여러 명의 감시자를 통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점령해 나갔으며, 두려움을 만들어 내는 위험 요소들을 하나씩 정복해 왔다. 이름 앞 글자에 ‘성(family name)’이라는 표식을 만들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번식하여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연대를 만들어왔다. 아주 작은 부족에서부터 시작해 여러 갈래의 지역과 국가로 분할되면서 다양한 문화와 인종, 종교로 구분되어 닿을 수 없는 견고한 벽이 세워졌다. 머나먼 과거에 기거한 또 다른 우리가 겪었던 생존본능은 사라졌지만, 이제 우리는 소비된 자연과 마모된 환경을 안고 있다. 내일이라는 일종의 목적과 성과를 위해 환경을 소모하고 갉아먹는다. 생존과 안전을 넘어 보이지 않았던 영역을 거침없이 파헤치고 들추어내었기에 이제 파멸되고 사라질 내일에 대한 공포가 오늘을 잠식하고 있다. 지금의 우리는 한계와 고갈이 자리하는 결핍의 땅에 서 있다.
# 신의 땅
미래, 내일, 앞으로 나아가는 가능성의 시간이 점차 사라지면서 인간은 죽음 이후의 삶, 영생과 믿음의 공간으로 시선을 돌리곤 한다. 기독교의 천국, 불교의 열반, 힌두교의 윤회와 같은 개념들은 모두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연속되고 연장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종교적 믿음은 신앙인들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된다. 종교적 의식과 예배 장소는 인간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신성한 공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이다. 예배당, 사원, 모스크와 같은 종교 건축물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신과 소통하는 신성한 장소로 인식된다. 이러한 영적 공간은 신성한 존재와의 교감을 통해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신을 찾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생존을 위해 다른 생태계를 파괴하고 개발하기 시작한 때부터, 혹은, 같은 종을 적대시하기 시작한 순간부터였을까. 아마도 환경을 비롯한 모든 종의 우위를 점했던 시점부터가 아닐까. 이 땅에 붙어 있기 위해 우리를 지탱하는 땅을 무너트리고 소진하면서 두발을 서 있게 할 내일의 땅이 점차 고갈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이 있는 영원의 땅을 밟고자 하지만, 우리가 딛고 있는 흙과 바위가 있는 이 땅은 더 이상 내일과 지속을 보장하지 않게 되었다. 여분의 땅이 사라진 이 바닥에서 더 이상 우리의 일상과 생활을 지속하고 유지하게 해줄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 명확한 면적과 기간을 보장하는 자본만이 땅을 일굴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 은폐하는 거울
이 사라지고 삭제되는 한정된 땅에서, 평면의 공간, 캔버스는 작가 에스까페아르에게 일종의 안식이자 영적인 공간으로 활용된다. 스스로 어떤 것을 은폐하려는 듯한 화면은 모래알, 혹은 진흙으로 뒤덮인 어느 해안가, 해변의 표면과 흡사하다. 그는 인간이 가진 가장 말초의 욕망에 시선을 집중한다. 동시에 감출 수 없는 강한 결핍과 폭발하는 과잉을 직면하면서 스스로 고민하고 고뇌한다. 그의 근작들을 살펴보면 은폐와 노출의 감정이 충돌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캔버스의 표면을 유영하는 붓과 손은 지우고 생성하기를 반복하면서 인간의 치부를 드러내고자 하면서 그것을 가리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그려졌다기보다는 문대고 쓸려진 자국들이 표면 위를 항해하고 있는 화면은 사라짐을 암시하는 동시에 새로운 형태를 갈구하고 있다. 이전까지 그의 작업은 어떠한 이야기와 표상을 쫓아갔다. 바라본 현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침투하여 어제의 치부와 내일의 공포가 충돌하여 만들어진 일종의 기념비, 사물로써의 명사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는 가리고 들추어내는 가감 없는 손의 동작을 통해 가장 기저에 있는 뿌리의 감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정된 단어, 견고한 울타리, 이야기의 기념비가 아니라 움직이는 동사, 유연하고 가변하는 동선, 가능성의 열린 결말로 가고자 하는 손짓을 건넨다. 이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회고하는 거울이자 서로 이길 수 없는 창과 방패의 즉흥적인 춤으로 발현된다. 생산과 파괴를 자행하고 탄생과 죽음을 경험하는 우리 자신에게 보내는 가장 원시적인 독백이다. 상하, 좌우의 구분이 모호한 그의 화면은 파국으로 치닫는 현재 진행형 시간을 담고 있다. 작가의 손에서 중력과 척력, 해체와 조합, 물리적인 법칙은 무력하게 평온한 풍경을 무너트린다. 이 화면에는 고갈되는 지면 위에서 흔들리는 유약한 얼굴이 담겨 있으며, 파멸과 생성이 교차하는 경계의 시간을 품고 있다. 작가는 불완전한 미래를 향하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손에서 연장된 붓, 그 끝을 부여잡고 있는 물감을 거울삼아 감춰지고 은폐된 파괴의 얼굴을 가감 없이 들추어낸다.
# 재생의 노래
내일에 대한 기대, 미래의 가능성, 그리고 다음 세대에 대한 동경은 이제 오래된 유물이 되었다. 산업화 시대, 인간의 손을 대신하게 된 기계의 대량생산은 빠른 속도로 유토피아를 그려내면서 기존의 세계를 업데이트하고 확장했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자원 소모로 인해 점차 다음 세대가 누리게 될 환경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가상의 출현, AI의 성장은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이해하게 했지만, 많은 것을 잃게 하고 손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만들어 냈다. 이제 다음을 기약할 수 없고, 가장 가깝고도 내밀한 개별자의 영역마저 침범 받게 되었다. 이제 내일의 공간에는 파국의 이미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예언가의 날,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앞에 종말의 날을 상상하면서, 결말의 이야기가 퍼져 나가고 있다. 하지만, 사라짐은 새로이 생성되는 어떤 신세계를 전제하고 잉태한다. 물리적 범주에서 보면 죽음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 다른 유기물, 혹은 무기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보다 더 이상적인 세계, 어제와 오늘의 인내를 딛고 만나는 내일의 신세계를 위해 우리는 오늘도 나를 둘러싼 세계를 파괴하고 허문다. 작가 에스까페아르는 파괴되는 땅과 재건되는 기념비, 죽음으로 치닫는 몸과 잉태되는 시간 사이에서 스스로의 초상을 가늠한다. 자신의 얼굴에 숨겨진 수많은 파멸의 유전자를 되돌아본다. 이 땅에 기거하기 시작하면서 직면해 왔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피어나는 생존의 희망과 기원이 만나는 좌표에 그가 서 있다. 작가는 공포로부터 비롯된 환상과 환각으로 인해 잡을 수 없었던 멸망의 도상을 매만진다. 무너지고 쓰러져 만들어진 이 땅이 아니라, 다음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강박 사이의 가느다란 줄을 잡고서 한정된 시간에 반응하는 갈증의 웃음을 지어내고 있다. 이는 오늘의 끝자락에서 피어나는 지속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순환 속에 기거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에게 보내는 재생을 위한 노래다.
개인전 스케치 영상 @2024
전시관련
escapear tr. 타동사 [어원:서인도 제도] (말을) 전속력으로 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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